이슈 '한국은 일본에 주사기를 줘라' 기사 전문
본문
한국의 근대화에 있어서 일본의 공헌은, 의료의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정부가 긴 쇄국정책을 접은 것은 1876년 일본정부와 근대외교조약을 맺고 개항한 것이다.그 4년 전인 1872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이미 조선 최초의 근대 의술이 시작돼 있었다.일본 대마번 의사 다카다 히데사쿠가 연 진료소가 그 시작이다.
5년 뒤인 1877년 개항한 부산 지역에 일본인들의 이주가 늘었다.일본 외무성은 지금의 부산 중구에 관립 '제생의원'을 개설했고, 군의관이었던 야노 요시테츠가 원장이 됐다.
진료 대상은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도 그 대상이었다.제생의원의 규칙은 일본인 진료비가 6전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조선인 진료비는 320리로 일본인보다 싸게 정해져 있었다.당시 경제적으로 약자였던 조선인을 배려한 셈이다.
개원하던 1877년, 제생의원의 이용자는 연인원 6346명. 그중 일본인이 3813명, 조선인이 2533명이었다.부산거류 일본인 전용 병원인데 조선의 의료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매달 15일 조선인에게도 무료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했다.우리나라에서 천연두 퇴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석영 씨가 종두 접종법을 배운 곳도 이 의원이었다.
7년 뒤인 1884년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불만을 품고 청나라로부터 독립해 일본식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개화파(독립파)의 젊은 조선 관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때 조선왕비의 조카이자 친중(친청)세력 고위간부 민영익 대신이 칼에 맞아 크게 다쳤다.
13차례 칼에 맞아 위독한 상태였던 민씨는 친청 독일공사 멜렌도르프 씨의 품으로 옮겨졌다.궁정의 부름을 받은 어의들은 도움이 되지 않고,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레이스·뉴턴·알렌씨와 일본인 의사인 가이세 토시유키씨에 의한 외과 수술이 행해졌다.반기독교·반일의 대표격이었던 친청대신이 기독교 선교사와 일본인 의사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이 수술은 개화기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 현장이 되었다.
대신들이 3개월 만에 회복한 덕에 조선에서도 서양근대의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이듬해인 1885년 조선 최초로 국립근대의료기관 '제중원'이 설립되었다.현재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경쟁하고 있는 서울대 의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의대 연세의료원은 이 제중원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은 한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제중원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방영되었다.하지만 일본을 찬양하는 것이 금기인 한국에선 그의 활약은 생략돼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일본인에 의한 조선왕비 시해사건, 1909년 조선인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이 이어졌고, 1910년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시작된다.
다시 111년 근대화의 세례를 받으며 수없이 생명을 구했고 의료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했다.그리고 신형 코로나 시대를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맞이하고 있다.한국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너무 커져 일본의 기여를 모두 부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양식 있는 한국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단지,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지난해 한국의 자랑거리인 K 방역 논란은 일본에서 화제가 되면서 일본의 드라이브스루 설치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등 적어도 일본의 PCR 검사를 활발히 했다.
금년, 「K주사기」논쟁은 일본에서 화제가 되어, 적어도 소중한 신형 코로나 백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본인에게 접종되도록 자극이 되고 있는 것 같다.
150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한국인을 도와온 일본의 의료.이런 식으로라도 한국 의료가 일본 의료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면 좋든 나쁘든 한일 교류의 의미는 있는 셈이다. 이런 시점에 한국에 남는 주사기를 일본에 보내고 내년에는 일본에 남아돌 백신을 한국에 보냈으면 하는 어이없는 망상에 빠진다.
조선정부가 긴 쇄국정책을 접은 것은 1876년 일본정부와 근대외교조약을 맺고 개항한 것이다.그 4년 전인 1872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이미 조선 최초의 근대 의술이 시작돼 있었다.일본 대마번 의사 다카다 히데사쿠가 연 진료소가 그 시작이다.
5년 뒤인 1877년 개항한 부산 지역에 일본인들의 이주가 늘었다.일본 외무성은 지금의 부산 중구에 관립 '제생의원'을 개설했고, 군의관이었던 야노 요시테츠가 원장이 됐다.
진료 대상은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도 그 대상이었다.제생의원의 규칙은 일본인 진료비가 6전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조선인 진료비는 320리로 일본인보다 싸게 정해져 있었다.당시 경제적으로 약자였던 조선인을 배려한 셈이다.
개원하던 1877년, 제생의원의 이용자는 연인원 6346명. 그중 일본인이 3813명, 조선인이 2533명이었다.부산거류 일본인 전용 병원인데 조선의 의료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매달 15일 조선인에게도 무료로 천연두 예방접종을 실시했다.우리나라에서 천연두 퇴치의 아버지로 불리는 지석영 씨가 종두 접종법을 배운 곳도 이 의원이었다.
7년 뒤인 1884년 조선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불만을 품고 청나라로부터 독립해 일본식 근대화를 꿈꾸던 급진개화파(독립파)의 젊은 조선 관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때 조선왕비의 조카이자 친중(친청)세력 고위간부 민영익 대신이 칼에 맞아 크게 다쳤다.
13차례 칼에 맞아 위독한 상태였던 민씨는 친청 독일공사 멜렌도르프 씨의 품으로 옮겨졌다.궁정의 부름을 받은 어의들은 도움이 되지 않고, 미국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레이스·뉴턴·알렌씨와 일본인 의사인 가이세 토시유키씨에 의한 외과 수술이 행해졌다.반기독교·반일의 대표격이었던 친청대신이 기독교 선교사와 일본인 의사들에 의해 목숨을 건진 이 수술은 개화기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의료 현장이 되었다.
대신들이 3개월 만에 회복한 덕에 조선에서도 서양근대의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이듬해인 1885년 조선 최초로 국립근대의료기관 '제중원'이 설립되었다.현재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경쟁하고 있는 서울대 의대 서울대병원과 연세대 의대 연세의료원은 이 제중원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은 한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제중원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방영되었다.하지만 일본을 찬양하는 것이 금기인 한국에선 그의 활약은 생략돼 있다.
이후 1894년 청일전쟁, 1895년 일본인에 의한 조선왕비 시해사건, 1909년 조선인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이 이어졌고, 1910년 일본의 한반도 통치가 시작된다.
다시 111년 근대화의 세례를 받으며 수없이 생명을 구했고 의료기술도 눈부시게 발전했다.그리고 신형 코로나 시대를 한국과 일본이 함께 맞이하고 있다.한국의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너무 커져 일본의 기여를 모두 부정하려는 움직임도 있지만 양식 있는 한국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단지, 말할 수 없을 뿐이다.
지난해 한국의 자랑거리인 K 방역 논란은 일본에서 화제가 되면서 일본의 드라이브스루 설치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등 적어도 일본의 PCR 검사를 활발히 했다.
금년, 「K주사기」논쟁은 일본에서 화제가 되어, 적어도 소중한 신형 코로나 백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본인에게 접종되도록 자극이 되고 있는 것 같다.
150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한국인을 도와온 일본의 의료.이런 식으로라도 한국 의료가 일본 의료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면 좋든 나쁘든 한일 교류의 의미는 있는 셈이다. 이런 시점에 한국에 남는 주사기를 일본에 보내고 내년에는 일본에 남아돌 백신을 한국에 보냈으면 하는 어이없는 망상에 빠진다.
다른 글이 내용이 사실이어도 주황색 표시한 부분 때문에 주기 싫어지네 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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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신느님의 댓글
근대화 세례 지랄 염병떠네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ㅈ같은 말을 ㅈ같이하는 재주가 아주 남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