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얘기 (초스압) 천안문 6.4 항쟁 레어 사진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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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늘 홍콩에서는 천안문 항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다, 경찰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989년 4월 19일, 인민영웅기념비에서 열린 후야오방(胡耀邦) 추모 집회
민주화를 요구하는 중국 인민들에게 매우 동조적이었고, 당 고위 간부들과 친인척들의 부패에 공격적이었던
후야오방 당총서기는 원로들의 반발로 결국 1987년 사임한다.
1989년 정치국 회의 도중 발언을 막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던 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4월 15일에 사망하였고, 그를 추모하는 집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추모 집회는 지식인들과 노동자 그리고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거대한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된다.
1989년 4월 21일. 후야오방의 추모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군중은 후야오방에 대한 정확한 평가, 공무원의 직권을 남용한 불법 전매에 대한 처벌 등에 대한 내용을 담은 7개조 요구를 내놓았다.
1989년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 집회에서 공안과 학생 운동가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사진.
같은 날 4월 22일,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5월 1일, 학생 운동 리더인 왕단(王丹, 북경대 역사학과 1학년)이 학생 단식 운동을 선언하고 <단식서>를 발표한다.
5월 4일, 전국의 대학교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집결하기 시작한다.
5월 13일, 학생들은 공직자의 부패, 인권 유린, 사회적 규제를 비판하며 정부 개혁을 요구한다.
5월 16일, 중국 정부의 관영방송국인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의 몇몇 기자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천안문 시위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자증을 당당하게 들어보이고 있다.
5월 17일,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CHINA DAILY의 기자들이 천안문 시위에 참석했다.
5월 17일, 계속되는 단식 운동으로 쓰러져있는 북경대 학생들에게 의료인들이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같은 날 5월 17일 천안문 광장
5월 18일, 북경의 치안판사들이 정복을 차려입은채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천안문 시위 행렬에 참석했다.
5월 18일, 오토바이를 몰며 시위행렬에 참여한 노동자 집단
5월 18일, 시민들에게 환영 받는 시위대의 모습
5월 19일, 몇 인의 중국 공안들이 그들의 유니폼을 입은채 학생운동을 지지하며 천안문 시위 행렬에 참석했다.
5월 19일, 시위에 참석한 10대 청소년들
5월 20일, 계염령이 선포된다. 군인들이 천안문 광장에 배치되기 시작한다.
5월 20일, 계엄군 앞에서 천안문 항쟁의 목표를 목놓아 외치고 있는 북경대 학생
5월 20일, 계엄군에게 승리의 V 사인과 하며 외치고 있는 시민들. 계엄군 청년들은 묵묵한 표정을 짓고 있다.
5월 20일, 계엄군 군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계엄군들이 철모를 쓰고 있진 않다.
5월 22일, 인민일보의 기자들이 '계엄을 철수하고 인민을 보호하라'는 슬로건을 들고 천안문 행렬에 참석했다.
그러나 2021년 현재는... 인민일보는 중국 공산당의 정책과 이념을 전파・홍보・선전하는 공산당 기관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엔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동북공정 논란과도 연관이 되었다.
5월 22일, 시위의 규모가 너무 거대하다보니 계엄군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해산명령서를 공중에서 뿌리고 있다.
5월 23일, 몇 명의 시위대가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에 페인트를 던져 훼손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만 하라고 하는 다른 시위대에 의해 저지되었고, 공안에 잡혀갔다.
5월 29일, 노동자 집단의 비범한 등장.
5월 30일,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 자유의 여신상을 건조한다. 자유의 여신은 마오쩌뚱을 향해 횃불을 들어보이고 있다.
6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어린 소녀
6월 2일의 천안문 광장.
다가오는 날짜를 보며 이 글을 보는 우리는 점점 불길한 기분을 느끼겠지만, 저 분들은 앞으로 펼쳐질 일을 아직 몰랐을 것이다.
6월 3일, 철모를 쓴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의 몸싸움이 발생한다.
소녀를 연행하던 계엄군이라고 설명에 나와있는데 어째 그걸 막는 아재가 더 아프게 하는 것 같긴 하지만 (?)
6월 3일, 시내버스로 방벽을 세운 시위대
6월 3일 밤, 장갑차에 불을 붙이고 파괴하는 시위대
6월 4일 새벽, 투입되는 개엄군들
6월 4일 새벽, 부상 당한 외신 기자
6월 4일 새벽,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시위대
6월 4일 새벽, 계속되는 시위
마치 전쟁이 휩쓸고간 시가지를 보는 것 같다.
정확히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살 당했는지 알지 못하는 악몽의 방이 지난 후
6월 4일의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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