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미군이 중공군에게 처절하게 털렸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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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미군 제 2 보병사단 '인디언 헤드'는 11월 29일∼12월 1일 사이 동안 평안남도 군우리일대에서 벌어졌던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철수작전을 펼쳤다. 이들이 지나가야 할 경로는 10km 정도에 이르는 갈고개 일대였다.
중공군은 이미 미군의 퇴로를 차단했고 계곡 능선 사방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주요 길목의 감제고지는 모두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이 가지고 있던 전차를 비롯한 지상화력과 공군의 공중지원은 쓸모 없었다. 중공군은 전차는 통과 시키고 보급부대나 포병부대 같은 전투력이 약한 부대만을 골라서 공격했으며, 미공군기가 나타나면 부리나케 숨어버렸다. 미군들이 전진 할 수 있는 시간은 공중폭격이 지속되는 단 몇분 간 밖에 없었다.
폭격이 끝나면 중공군들은 다시 기어나와 미군 행렬을 공격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동이 멈추고 사상자를 수습하느라 시간을 계속 지체됐다.
중공군은 나중에는 소규모 침투부대를 편성하여 중간 중간 떨어진 미군의 행렬 사이를 끊어버리기도 하고, 아예 보병들이 전차에 들러붙어 전차가 기동이 느려지는 틈을 타 병목 현상이 발생하면 그곳에 박격포를 집중 사격하는 전법까지 구사했다.
전방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찰을 나간 수색대는 모두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했고, 미군은 앞에 무엇이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계속 나아가야만 했다.
나중에는 중공군이 격파할 방도가 없는 전차를 빼면 장갑차나 트럭 같은 장비들은 모두 격파되버렸다. 미군들은 중장비를 버리고 전차 위에 부상자들을 싣고선 그저 앞만 보고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사단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낙오자와 부상자들은 혹한의 추위속에서 얼어죽거나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고갯길을 겨우 빠져나온 군인들도 모두 지옥을 보고 온 것마냥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나마 미군들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계곡을 돌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공군에게 마땅한 대전차 화기가 없어서 전차를 격파하지 못한 점, 보급 부족으로 인한 탄약 수급 불가능으로 공격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군들은 자신들 처지를 부대마크가 인디언인 것에 빗대어 우린 지금 '인디언식 태형' (Indian gauntlet-과거 서부 개척기에 인디언들은 미군이나 개척민을 사로잡으면 부족 전체가 양쪽에 일렬로 쭉 늘어서서 포로에게 그 사이를 통과하라고 한 뒤 마구 구타했음.)을 당하는 거라며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불도저 같은 중장비로 인해 최후미에서 행군하던 제2공병대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이었던 대대장 '알러리치 자켈레' 중령은 전방에 있던 호송대가 3km도 전진 하지 못하고 생포당했다는 연락을 받고선 최후를 직감했다. 그리고 부대기를 적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부하들에게 지시하여 부대기를 불태워 버렸다. 제2공병대는 977명 중 266명만이 귀환 하였고, 자켈레 중령은 포로가 되어 2년 반만에 송환 되었다.
최종 집결지인 영등포에 도착했을 때, 제2보병사단의 총 사상자수는 부대의 1/3인 4500명에 이르렀다.
이는 미군 역사상 전무후무한 패배로 기록 되었다.
훗날 생존 장병들과 역사가들은 이들이 지나간 군우리 이남 10㎞의 고갯길을 '죽음의 계곡'이라 불렀다.
그 후로 미 2사단은 한국에 고정배치되어 주한미군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며, 제2공병대는 매년 12월1일이 되면 '부대기 전소식'을 거행하며 그날의 치욕과 패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관습이 생겼다.
만일 제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한다면, 미 2사단은 북한을 지원하는 중공군과 제일 먼저 맞붙게 될 운명인 셈이다.
3줄요약
1. 1950년 겨울에 미군 2사단이 후퇴하다가 계곡지형에서 중공군에게 처절하게 다구리를 맞음.
2. 이걸로 사상자가 부대 1/3 가까이 나옴.
3. 그 이후로 2사단은 언젠가 다시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칼을 갈며 한국에 주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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