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죽음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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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건만 다뤘으며 그보다 적은 규모의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제암리 학살 사건도 그 중 하나이다.
버마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 있다고 하는데 그건 못찾아서 일단 보류
잔인한 사진은 최소한으로 선정 했다.
뤼순 대학살
1894년 11월 21일 ~ 23일
사망자 2만명
청일전쟁 당시 뤼순항을 점령한 일본군은 청군과 민간인을 합쳐 2만명을 학살한다.
이후 36명만을 남겨뒀는데 이는 시체들을 매장 하기 위해 남겨둔 인원이다.
남한 대토벌 작전
1909년 9월~10월
사망자 17,779명 부상자 376명 포로 2,139명
전라남도 지방에서 일본군이 의병들을 뿌리 뽑기 위해 벌인 작전.
이로 인해 한반도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은 씨가 말랐고 무장 투쟁 거점이 만주,러시아로 올라간다.
민간인 피해는 따로 집계 되지 않음.
간도 참변 (경신 참변)
1920년 10월 9일~ 1921년 5월
사망자 3,000명이상 (1만명 까지도 추정)
봉오동 전투 이후 만주에 출병한 일본군이 조선인이 살던 지역을 점령했다.
이후 청산리 전투의 보복으로 살인,방화.강간등 학살을 저지른 사건.
관동 대학살
1923년 9월
사망자 파악 불가
관동 대지진 직후 일본군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
일반적으로 자경단에 의한 학살을 말하나 자경단에 의한 학살 외에도 일본군에 의해서 학살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지시를 받은 자경단이 학살을 하기도 했다.
자경단과 일본군이 죽인 숫자를 전부 합치면 2만여명 이상 추정
신멸 작전
1939년~1945년
사망자 1000만~3000만 추정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중국 대륙을 상대로 한 초토화 작전.
일본군이 지나간 곳은 재산도 생명도 모조리 빼앗기고 죽었다.
난징 대학살
1937년 12월~ 1938년 1월
최소 5만~ 최대 40만명의 사망자 (중국 정부 추산 30만명)
중일전쟁 당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벌인 대대적 학살 사건.
일본군은 단 6주동안 난징에서 수 십만명을 학살하고 강간했다.
충칭 대공습
1942년 2월~ 1943년 8월
사망자 11,889명
중일전쟁 중 일본이 군수 공장이 위치한 충칭을 장기간 동안 폭격한 사건.
일본이 이 사건을 일으켰기에 미국도 도쿄 대공습을 실시할 수 있었다.
숙칭 대학살
1942년 2월 ~ 3월
사망자 2만5천~5만명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 저항군을 없앤다는 목적으로 화교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
바탄 죽음의 행진
1942년 4월
사망자 1만명 이상
일본군이 76,000여명의 연합군 포로를 일체의 식량 배급 없이 120km 행군 시켜 사망케 한 사건.
영양실조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지만 낙오한 포로들은 그 즉시 살해 당했다.
죽음의 철도 사건
1942년 6월~ 1943년 10월
사망자 11만명 6천명
6만명의 연합군 포로과 아시아에서 민간인 20만명이 태국과 버마(미얀마) 사이에 있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강제 동원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대, 질병, 영양실조로 11만명이 사망한다.
영화로도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도 이 사건에서 만들어진 것.
산다칸 죽음의 행진
1945년 1월~ 8월
사망자 2000여명
일본군은 연합군 포로를 150km 떨어진 곳으로 이동 시켰는데 2000여명 중 1000여명만 행군에 참가했다.
행군 도중 500여명이 낙오하여 죽거나 총살 당했으며 도착한 400여명도 질병과 영양실조로 사망한다.
33명은 살아남았지만 이후에 총살 당한다.
남아 있던 1000여명도 질병, 영양실조, 총살로 전부 사망한다.
수용소에 있던 포로중 탈출한 6명만이 살아 남았다.
마닐라 대학살
1945년 2월
사망자 12만 5천명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은 미군과 맞붙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마닐라 시민들이 미군에 협력할 것을 염려했고 보름간 학살을 시행한다.
당시 마닐라 시민은 70만명이었으며 1/7 이상이 사망한 것이다.
개드립 - 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군에 의한 대규모 죽음들.jpg ( https://www.dogdrip.net/275328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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