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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쇠붙이인 줄 알았다..씻어보니 한글, '흥분이 시작됐다' [금속활자 출토 공평동 유적 현장]

 

입력 2021. 08. 01. 13:15

수정 2021. 08. 01. 13:18

 

https://news.v.daum.net/v/20210801131514265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2020년 3월9일 발굴 조사에 들어갔다. 1년3개월이 흐른 지난 6월1일 발굴단원이 쇠붙이 하나를 찾았다. 연구원들이 그 소식을 듣고 확인하니 총통이었다. 조사 결과 밝혀낸 건 승자총통(1583년) 1점, 소승자총통(1588년) 7점이다. 보고를 받고 다음 날 오 원장이 현장에 갔다. 다른 쇠붙이들도 발견했다. 포탄을 엎어놓은 형태의 동종의 파편,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용 모양 손잡이)를 캐냈다.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일성정시의, 자동 물시계의 부품인 주전으로 보이는 동판도 찾았다.

“건물 고막이(벽체의 기초) 옆에서 쇠붙이들이 나왔죠. 총통하고 일성정시의를 수습했더니 항아리 편이 하나 뚝 떨어지는 거에요. 항아리가 토압(土壓)으로 깨졌던 거죠.”

 

공평동, 청진동 일대 유적에서 항아리는 곧잘 나온다. “항아리를 한 스무 개 출토하면 한 개 정도만 뭐가 들어 있죠.” 이 항아리들과 성격은 다르지만, 공평 1·2·4지구의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쪽에서도 진단구를 여러 점 발굴했다. 건물을 지을 때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려 묻는 항아리다. 별다른 내용물을 확인한 적은 없다. “항아리에서 공깃돌 같은 게 한 두 개 떨어져서 현장에서 바로 씻어 보니 금속 활자였어요. 항아리를 싸서 바로 연구원으로 가서 분류 작업을 했죠.”

 

오 원장은 ‘쇠붙이들’이 처음 나왔을 때 크게 중요한 유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세척한 쇠붙이에서 한글이 드러난 걸 보곤, 흥분이 시작됐다. 활자 전문가들을 불러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정조 시기 사회가 발달하고, 문화 저변 확대 같은 게 일어나다 보니, 조선 후기 금속활자는 남은 게 수십만 점 정도 돼요. 그런데 조선 전기 금속 활자가 거의 없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세조 즉위년인 1455년 주조한 ‘을해자’가 30점 정도 있죠. 이 항아리 하나에서 대여섯 종류 활자 1600여 점이 나온 거예요. 전문가들도 ‘못 보던 게 나왔다. 을해자, 갑인자일 수도 있다. 이건 국보급이다. 활자 연구를 다시 해야 할 정도’라며 격앙됐어요.”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물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세종 때 4개만 만든 일성정시의도 문헌에만 나온다.

 

청진동 르메이에르 빌딩 재개발을 할 때부터 서울 도성 발굴이 시작됐다. 누군가 석재를 옮겨 나가는 걸 보고 “문화재가 반출되고 있다”고 관청에 신고했다. 실제 파보니 문화재가 나왔다. 이후 서울 도성 안에서 빌딩을 지을 때는 문화재 조사를 하도록 했다.

 

누가, 언제, 왜?

다시 발굴 때 이야기를 들었다.

“동종같이 덩어리가 큰 건 항아리 밖에 두고, 금속활자처럼 작은 건 항아리 안에 뒀어요. 이걸 그냥 땅에 묻어두면 나중에 다시 수습하기 어렵잖아요.” 쇠붙이들은 다 동(銅)이다. 15세기까지 조선은 주조 기술이 좋았다. <태종실록>을 보면, 1417년(태종 17)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동철(銅鐵) 5백 근을 보내었으니, 종(鍾)을 본보기로 만들어 주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 시기 장신구·마구, 통일신라·고려 때는 불상·범종에 쓴 금속이다. 값어치는 어느 정도일까. 조선 전기와 후기를 1대 1로 비교할 순 없는데, 대략 가치를 짐작할 기준 하나는 있다. ‘조선숙종시대의 광업 및 주전연구’(김양구, 1973) 논문엔 1801년 이후에는 구리 1근의 가격이 은 1량으로, 현대 시세보다 10배 높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육하원칙 중 풀리지 않은 의문을 두고 오 원장은 지금 공평동이 시전 중심가인 운종가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발굴 지역에 시전 상인 창고가 많았던 건 분명해 보여요.” ‘시전 상인이 임진왜란(1592~1598)이 났을 때 값어치가 나가는 구리 중 작은 것(금속활자)은 항아리 안에 두고 큰 것은 곁에 묻고 피난 갔다’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중인일까?

 

“항아리를 발굴한 곳 밑에는 15세기 집터가 또 있어요. 습지이다 보니 사람들이 다져진 터에 다시 흙을 붓고 계속 올려 지었죠. 배수로도 올라오고, 집 석축도 올라오고요. 20세기까지 이어진 거죠.” ‘나 구역’ 모서리 끝에는 조선 시대 돌덩이 위로 일제 강점기 벽돌이 드러난다. 일제 강점기 종로대로가 정비되며 다져진 지표 높이가 지금까지 유지됐다. 오 원장이 말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땅 밑에 60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다 남은 거죠. 문헌으로만 전하던 유물들도 드러났고요. 로마 같은 도시처럼 문화와 같이 숨 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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