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충무공이 가장 믿고 의지한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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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만호 정운
1542~1592 10월 5일
해남 옥천면 대산리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기록에 나와
7세 때 정충보국 ( 貞忠報國) 이라는 글을 벽에 붙이고 집안의 보검을 든 다음 나라를 위해 싸우겠단 뜻으로 살다가 28세에 무과에 급제 후 북방에서 여진족과 싸워서 공을 세워
이후 웅천현감 삭녕군수 등을 거치다가 임진년에 녹도만호가 되고 충무공 이순신의 선봉장이 되어 최전선에서 싸웠어
임진년 초기 충무공에게 왜군이 호남으로 오기 전에 먼저 적을 공격하자고 말했으며 이때 선봉장이 될것을 자청해.
옥포해전 ,사천해전 , 한산도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고 왜군의 근거지인 부산을 공격하는 부산포해전에서도 선봉이 되어서 싸우다가 대조총에 맞고 전사해.
부산포 해전에서 적선 500척과 싸웠고 이중 100척을 격침 시켰는데,
기록에 따르면 참나무방패 셋을 그리고 쌀 2석 까지 뚫고 정운까지 관통 했어.
(대조총. 대좆총 아님. 들고 다니는게 아니고 배에 두고 씀)
충무공은 직접 제문을 짓고 그를 위로하지
"그대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를 위해 던진 그 몸은 죽었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다.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삶은 하늘에 달렸으니, 사람으로써 한번 죽음에 아쉬워 할 이유가 없으나, 오직 그대를 위하여는 마음이 아프도다."
-제증판참정운문-
전란이 끝난 후 병마절도사에 추증되고 나라에서 사당을 지어줬어 이후 효종대에도 사당을 짓고 숙종대에는 충절사 라는 현판이 내려지고 정운이 사망한 날에 "부산시민의 날" 이 지정됐어.
해군 출신은 알겠지만 정운의 이름을 딴 장보고급 잠수함인 정운함 이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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