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삼대에 걸쳐 완성 된 전술 "망치와 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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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와 모루는 아주 단순해보이지만, 현대사에서도 쓰일만큼 강력한 전술로 남아 있다.
"아무리 강력한 쇠라 한들, 모루에 대고 망치로 두들기면 부술 수 있다" 라는 점에서 착안한, 일종의 포위 전술이다.
그 시작은 레옥트라 전투였다.
레옥트라 전투는 스파르타 vs 테베의 전투였는데, 아무래도 병력의 질이 좀 더 좋은 스파르타가 유리했다.
기본적으로 당시 그리스의 전술 형태는 이랬다. 이런 진형 상태에서 맞다이를 뜨게 되는 것.
스파르타 역시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진형을 세웠고, 중장보병으로 8~12겹에 이르는 방진을 형성했다.
또한 우익에는 가장 강한 부대를 배치 해 우익의 약점을 보완했으며, 반대로 좌익에는 가장 약한 부대를 배치했다.
에파미논다스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기병과 50겹에 이르는 보병을 좌익에 배치하고, 그 탓에 약해진 중앙과 우익은 점점 뒤로 물러나서 진형을 짜는, 사선진의 형태로 구성을 한 것이다.
그렇게 교전이 일어나자, 아무리 정예병이라 한다한들 12겹이었던 스파르타의 군대는 50겹의 테베군을 이기지 못 했고 결국 우익이 뚫려,
상대적으로 약한 병력이었던 중앙과 좌익 역시 모랄빵이 나버려 패하게 된다.
물론 이 레옥트라 전에 쓰였던 전투 방식이 정말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의도한 것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에파미논다스가 이길 방법이 이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 사선책 전술을 썼는데 어쩌다보니 망치와 모루가 됐다는 시선도 많다.
어쨌든 망치와 모루 형태를 가지고 승리한 이 전투로, 테베는 그리스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필리포스 2세가 등장하게
된다.
필리포스 2세는 위 레옥트라 전투의 주인공이였던 에파미논다스의 제자 생활을 했는데(그 경위에 대해서 상황 설명하기엔 내용이 산으로 가니 넘어가도록 하자)
에파미논다스의 전술,전략에 크게 감명 받았고 특히 레옥트라 전투에 사용 되었던 전술을 토대로 망치와 모루를 완성 시키기 위해 나선다.
우선 그는 모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전술이 완성하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은 모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보병단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기존 그리스 군대가 쓰던 창(2m~3m)보다 두 배는 긴 사리사(4m~6m)라는 긴 창을 사용 했다. 가늠이 안 될 거 같아 이미지를 첨부한다.
위의 사진이 (구)그리스 국가들이 사용했던 창이고, 아래 사용했던 창이 필리포스 2세가 사용했던 창이다.
당연히 이런 전문적인 무기를 활용하기 위해선 전문 보병부대가 필요 했는데 이를 "페제타이로이"라고 부른다.
모루는 완성 되었으니, 이제 망치의 역할을 만들 차례다.
바로 기병대 "헤타이로이"다.
적의 양 익을 뚫고, 적 본진을 뚫어야 하는 창의 역할을 하는 명예로운 역할이었기에,
필리포스 2세는 오로지 마케도니아 귀족들만으로 구성했다.
다만 후계자였던 알렉산더는 이 창의 역할과 숫자를 늘리기 위해 그리스나 마케도니아인이 중 능력이 좋은 이라면 누구든 채용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도 편입을 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마케도니아 순혈 귀족들에게 많은 반발을 샀다.(이 역시 이야기가 산으로 가니 넘어가도록 하자)
페제타이로이와 헤타이로이.이 두 존재로 인해
보-기 합동전술로서 "망치와 모루"의 개념이 잡혀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술이 시범적으로 사용 된 전투는
이 전술로 그리스의 주인이 된 테베의 운명을 결정 짓게 된 "카이로네이아 전투"였다.
보병끼리의 전투가 고착되어 가기 시작했을 때,
필리포스 2세는 보병을 후퇴시킨다.
아테네는 이를 추격하고, 이 탓에 진형이 엉망이 된다.
이 기회를 이용해 후퇴하는 척하던 마케도니아군 우익이 아테네군을 공격해 패주시키고, 마케도니아군 좌익이 테베군의 측면인 오른쪽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특히나 공격에 노출된 아테네군의 오른쪽은 무기를 든 손 방향이기에 측면공격에 취약한 부위였다.
이로 인해 망치와 모루의 전술은 실효성을 보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리포스 2세는 이 전술로 더 재미를 보지 못 했는데, 2년 후 자신이 암살 되었기 때문이다.
(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더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항상 "헤타이로이"의 선봉으로 싸웠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이었지만 이로 인해 아군의 사기,전투력 또한 크게 증가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우가멜라 전투 역시 이런 망치와 모루 전술을 토대로 싸웠는데
1.팔랑크스는 사선진 형태. 그리스 중장보병 중 일부를 팔랑크스 뒤쪽에 배치
2. 알렉산더의 기지로 적의 주력 병장이었던 낫전차를 무효화
3.그러나 이 전술로 마케도니아 군 중앙(모루)가 좌익과 끊어진 것을 페르시아 군이 확인. 페르시아 군 우익은 좌익을 공격
4 이미 알렉산더가 사전에 배치해둔 그리스 중장보병(1번)이 반격에 나섰고, 페르시아 군 우익의 일부는 마케도니아 캠프로 이동. 교착 상태가 됨.
5. 페르시아군 중앙은 팔랑크스(모루)에게 막혀 공격을 받는 탓에 다리우스 3세 본 진영과 크게 떨어졌고, 우익 역시 마케도니아의 좌익을 뚫느라 지원이 불가능한 상태.
6. 이 벌려진 틈을 놓치지 않고 알렉산더는 헤타이로이 기병대를 대부분 이끈 채 다리우스 군에 닥돌.(굵은 화살표가 알렉산더의 이동 경로)
7. 갑작스럽게 공격 받은 다리우스 본군은 모랄빵 나버렸고, 결국 호다닥 엔딩으로 마무리.
이 전투만이 아니라 알렉산더는 그라니코스-이수스 등 대부분의 전투에서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한다.
망치와 모루는 이후 한니발 바르카에 의해 새롭게 다듬어지고
현대전까지도 쓰이고 있는, 위대한 전술이 된다.
근데 이거 넘 길어서 아무도 안 읽겠지? 힝 슬프다..
공부 햇다 치고 넘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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