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시대 불교탄압 : 부처는 패륜아 + 스님은 밥버러지
본문
● 고려~조선시대의 신분 변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회계층 중
가장 신분상 변화가 많았던 이들은 누구일까?
1. 양반?
고려 때 양반은
조선 때 양반과 기본적으로 같다.
고려시대의 문관, 무관의 틀을
조선왕조에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향리?
고려 때 귀족 계층이던 향리가 (정도전도 향리 출신이다)
조선 때는 중인 계층으로 몰락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는 없다.
3. 백정?
고려 때 평민이던 백정이
조선 때는 최하층 천민이 되었지만
그래봤자
1단계 강등이다.
4. 스님!
정답이다.
고려시대 당시만 해도 스님은
귀족의 일원이자, 무위도식했던 계층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노비보다도 못한 천민이자,
온갖 잡일을 도맡아했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조선시대를 비교하자면
스님만큼 180도 신분이 바뀐 계층도 없었다.
과장을 하자면 전두환의 쿠데타로,
육군 대장에서
하루 아침에 이등병으로 12단계 강등된
정승화 참모총장의 꼴이랄까?
정승화
●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의 '불교 죽이기' 프로젝트
때는 1390년,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은
대차게 불교를 깠다.
나라를 좀먹는 일등공신으로
이구동성 불교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김자수
"불교를 숭상하고 탑과 절을 많이 만드는 게
과연 나라를 위한 길입니까?"
김자수
"신라가 불교행사를 많이 한 탓에 망했다는
태조(왕건)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훈요 10조의 유훈을 보면,
연등회,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꼬박꼬박 챙길 것을 당부했었다.
어쩌면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던 공양왕이
무식하다고 생각해서,
거짓말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공양왕
"헐, 태조대왕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김자수
"지금 불교행사 때문에
거덜나는 나라 경비가 한두푼이 아닙니다."
이에 신료들도
대대적으로 거들었다.
신료
"부처가 어찌 사람입니까?
신료
"아들이라는 작자가 아버지와 연을 끊고,
왕 노릇도 사양하질 않나,"
신료
"자기 마누라도 버리고
집을 나왔으니.."
신료
"이는 군신, 부자, 부부의 도리를 모두 저버린
패륜아의 행태이옵니다."
공양왕
"헐, 말이 심하지 않는가!"
'놀랄 노'자였다.
고려왕조에서 불교는 곧 국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고려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당시에는
불교는 더 이상
숭배의 대상도 아니었고
오히려 철저한 탄압의 대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여기에 당대 사대부들의
대표격이 되는 정도전은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의 불교를 이렇게 비판했다.
정도전
"불교, 그게 어디
사람이 믿을만한 종교인가?"
정도전
"사람이란 무릇 자식을 낳아
나라를 영속시켜야 하거늘.."
정도전
"금욕한답시고 여자를 멀리하고 자식을 못낳게 하니
부국강병은 고사하고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
정도전
"이렇게 위험한 종교가 어디 있겠는가?"
정도전
"불신자들은 평소 어떠한 생산적인 일을 했던가?
물 한 모금, 쌀 한 톨 먹어도 죄다 구걸질이다."
정도전
"이런 것들이 계속 성행하다가는
결국 나라가 망한다"
즉 사대부들 생각에
불교 신자들은
전혀 생산성이 없는
나라의 식충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고려시대 승려들은 전체 인구의 10%나 됐었다.)
불교 옹호론자
"에이, 그래도 석가모니께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많은 고생을 하셨고.."
불교 옹호론자
"하루에 쌀 한 톨,
물 한 모금만으로 연명하다가,"
불교 옹호론자
"피골이 상접하도록
고된 수행을 하셨던 분이심."
그러자 정도전이 반박한다.
정도전
"일도 안하는 작자가 쌀 한 톨을 먹었다면
이는 필시 빌어먹는 것이니, 이것도 잘못임."
정도전
"지렁이처럼 아예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 도리임."
그런가하면 사대부들은
이런 식으로도 부처를 비방했다.
신진사대부
"부처는 본시 오랑캐이며
중국과는 말도 달랐다."
신진사대부
"우리가 어찌 그런
미개한 족속의 뜻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신진사대부
"사람의 생과 사는
자연의 섭리이거늘.."
신진사대부
"백성을 혹세무민하여
잡신을 섬기게 하는 것은 사회적인 폐단임."
이쯤되면 부처는
더 이상 신도 뭣도 아니었다.
사대부들에게 부처는
한낱 인륜을 저버린 패륜아,
중원 바깥의 오랑캐,
혹세무민하는 잡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대략난감해진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성계.
이성계
"아놔, 지금까지 불교를 믿었는데..
사대부들 말이 불교 믿으면 안 된다던데."
이지란
"형님, 어쩔수 없다 아임매."
이지란
"대업을 이루시려면,
그까짓 종교 날래 버리시라요."
그래서 이성계는
불교를 믿지 않게된다.(사적으로는 믿었다)
● 조선시대의 기본 마인드 : 중들은 밥버리지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자
노골적으로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태조
"불교의 교리가 나쁘다는 게 아니야.
나도 한때 불교신자였는걸.."
태조
"다만 고려 때처럼
승려들이.."
태조
"거대한 재산을 가지는 따위는
국가에 전혀 도움이 안됨."
태조
"그래서 불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겄임."
그리고 이성계는 이런 명령들을 내린다.
태조
"앞으로 백성들이 절에 땅이나 노비를
헌납하는 것은 절대 금지."
태조
"또 앞으로 승려가 되려면.."
태조
"양반은 베 100필, 평민은 150필,
천민은 200필을.."
태조
"나라에 바쳐야
승려가 될 수 있는 도첩제를 주겠어."
참고로 베 200필이면,
쌀로 환산하면 100가마니, 즉 5년치 연봉이었다.
그냥 승려가
되지 말라는 말이었다.
당시 불교가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은
고려시대 때
지나친 사원의 부정축재 탓도 있었지만
나라와 백성의 살림에
전혀 도움은 되지 않고
해만 끼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만약 모든 사람이
불교의 교리대로 산다면
남녀가 교합하지 못하니
인구가 늘지 않을 것이고,
남은 사람도
일하지 않고 빌어먹으니
결국은 모두 굶어 죽어
사람의 씨가 마를 것이라는게
여말선초 사대부들의
'경제 철학'이자 '인구론'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군대도 가지 않아
나라에 보탬이 전혀 되지 않았으니
사대부들이 보기에
국가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는, 식충이 그 자체였다.
정도전
"불씨들은 생산 능력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밥버러지들!"
세종 때 사헌부의 상소문에는
이런 장계가 있었다.
신하
"승려들은 백성의 양식과 옷을 뺏어다가
한낱 흙과 나무로 만든 불상 따위에게.."
신하
"옷과 음식을 갖다바치고 있으니,
이런 무고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경향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
실학자들도 중이라면 학을 뗐으니,
이익
"놀고먹는 좀 여섯 마리 가운데
한마리 씩은 반드시 중놈들이다."
● 조선시대의 노골적인 불교 탄압
선조가 경연 자리에서 물었다.
선조
"중들은 왜 모두 석(釋) 씨임?"
유희춘
"인륜을 배반하고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스승이 죽으면 불태워버리는 자들이니,"
유희춘
"자기 아버지 성을 모두 석씨라고 하는 것이
무어 그리 괴이하겠습니까?"
선조
"저런 몹쓸 것들.."
심지어 중은 조선의 백성이 아니라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 일이었다.
유생들은 원각사에 놀라갔다.
사대부
"아니, 중대가리 주제에
선비들이 왔으면 냉큼 인사를 하지 않고.."
유생들은 그곳에서
승려 '학조'가 무례하다고 하여
부채로 머리를 때려
피가 줄줄 흐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원각사의 절은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자주 가던 곳이었다.
그녀는 시아버지 세조처럼
불교에 호의적이었고,
망해가던 조선 불교에
그나마 힘이 되어주던 실세가였다.
인수대비
"이런, 고얀 유생들을 봤나!"
소식을 들은 인수대비는 크게 노했고
성종이 겨우겨우 말려 진정을 시켰다.
성종
"어마마마 참으소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이후 성종이
생각해낸 묘책은
유생들이 아예 절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산길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유생들 사이에
점점 의혹이 일어났다.
사대부
"아니, 왜 절 구경도 못하게
모든 길을 막았지?"
곧 사헌부, 사간원에 홍문관 관원들까지
벌떼같이 들고일어나 왕에게 성토했다.
신하1
"전하, 선비들이 사찰의 풍경을 즐기지 못하게
길을 막는 것은 부당하옵니다."
신하2
"혹시 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유생들을 억누르려 하는게 아니신지요?"
그러자 성종은 반박했다.
성종
"백성들이 서로
각자의 도리를 지키고 살면 그만이지.."
성종
"중들도 왕의 백성인데,
내가 그들을 보호하는게 뭐 그리 잘못이란 말이요?"
그러나 신하들은 막무가내였다.
신하3
"중들은 나라에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들인데,"
신하3
"어찌 그들이
전하의 백성이겠나이까?"
이에 성종은 기가 막혀 노발대발했지만
결코 신하들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보기에 조선시대 중들은
백성도 아니었던 것이다.
심지어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유형원
"조선이라는 나라가 발전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유형원
"먼저 전국의 중들에게
하루 빨리 속세로 돌아오도록 명령한다."
유형원
"이를 듣지 않은 자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사찰을 폐쇄하고, 곤장 100대로 다스린다."
유형원
"그런데도 말을 않듣는 자가 있으면
모두 노비로 삼는다."
유형원
"이러면 불한당 같은 승려들이 없어져서
조선은 부강해질 수 있다."
● 그렇다라도 불교는 없어지지 않았다 : 인간의 내세신앙 본능
그렇다고 승려들이 조선시대 내내
괴롭힘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불교를 멸시했지만
평민과 천민들은
꾸준히 절에 들려 시주를 했다.
사실 이는 유학을 공부하는
양반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유교이념 강화를 주장하다가도
집에 들어와서는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대부
"솔까말, 야동 나쁘다고
집에서도 안 봄?"
정통 유교의 활성화에 정성을 쏟았던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서는
사찰(용주사)을 짓도록 했고,
김홍도에게는 '탱화'를 그리도록 시켰다.
▲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용주사
"정조 임금이 왜 그랬을까?"
"정조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깐?"
"무슨 뜻?"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런 말을 했지.
사후 세계는 공자님도 챙겨주실 수 없다고.."
"결국 왕이나 사대부들도
사후 세계가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이고.."
"때문에 윤회사상이니,
극락, 지옥에 관심이 없을 수 없었던 거임."
"하긴 유교가 완벽한 종교는 아니지."
"그런 인간의 본능 때문에
조선시대에 불교는 꾸준히 연명할 수 있었어."
그런데 여기에도
시비가 없을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 성종 때
이런 에피가 있다.
당시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복을 받겠다고
절에 논밭을 시주했는데,
오히려 그 뒤로 하는 일마다 망치고,
결국 가세가 기울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을 사또한테 따졌는데
패소하고 말았다.
"아놔, 열받어.
이번에는 나랏님에게 따져보겠어."
그리하여 신문고를 두드렸다.
그리고 성종이 듣고보니, 사정이 딱했다.
성종
"아니, 복을 받고자 시주한 것인데
집안이 오히려 망했다면.."
성종
"부처가 영 약빨이 없는 것 아닌가!"
신하
"맞사옵니다."
성종
"그렇다면 마땅히 절에서
시주받은 걸 돌려줘야지."
성종
"그런 책임도 없이
무조건 시주만 받으려는 것은 잘못이다."
때문에 논밭을 돌려받게 되었다.
● 사대부들의 음해 : 절간은 매음굴?
조선시대 사대부 여성들은
사회 활동이 제한되었고
중문 밖을 나서지도 말라고
강요당했다.
▲ 중문
그러니 사대부 여자들은 외출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그래도 예외적인 일이 있었으니
절에 불공 드리러 가는 일이었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해주세요."
특히 사찰의 '불교 이벤트' 시기는
여인들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 절에 올라가는 부녀자 : 신윤복 혜원진신첩 中
그런 이벤트란,
석가모니 탄생일인 4월 8일 초파일,
성도일인 12월 8일, 7월 보름의 우란분절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 날에는
절에 수많은 신도들이 모여들어
왁자지껄하며
야단법썩을 떨기 일쑤였으니,
야외에서 벌어지는 법회는
사람들이 바글거려 늘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사대부들에게
이런 모습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사대부
"아주 저것들이 살판이 났네."
게다가 중과 부녀자들 사이의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김홍도의 춘화만 봐도,
노승과 머리 땋은 처녀가
방 안에에서 성관계를 맺고 있고
그걸 어린 동자승이 몰래 엿보고 있다.
그러니 선비들에게 절은
환락과 퇴폐의 소굴로 비추기 십상이었다.
▲ 조선시대 절은 남녀간 연애장소로 자주 애용됐다.
특히 비구승과 함께 살아가는
비구니들이 암암리에
아이를 낳는 일이 벌어진다는 등의
풍문이 잇달았다.
그런가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부녀자들이
절에 올라가 불공을 올리면서
야릇한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헐, 세상에 소문 들었는가?"
"이번에 불공을 들이러갔다던
김초시네 처가 임신을 했다지 뭔가."
"그거 잘된 일 아닌가!"
"사람 순진하긴. 김초시가 누군가?
소싯적에 소한테 거시기를 뒷발로 채인 후로.."
"아니, 그럼?"
"쉿!"
물론 절도 사람 사는 곳인데
그런 일들이 아예 없었다고는 못하겠지만
그보다 부풀려진 소문에 편승해서
일방적인 비난과
오해에 시달려야 했던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 힘 좋았던 스님들, 나라의 온갖 잡일을 도맡게 되다.
시들어가던 불교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서산대사, 사명당 등이 의병장으로
승군을 이끌고 왜병을 막는데 크게 일조를 하자
중들도 조금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된 것이다.
때문에 조선 전기 속절없이 무너져가던
불교의 법맥이 그나마 다시 일어서게 되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오히려 그게 더 화근이었다. ☞ 참고
"중넘들이
그렇게 힘이 좋은줄은 몰랐다니깐."
"그러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쓸모 없는 줄 알았던 중넘들이
왜병을 때려잡을 줄이야.."
"중넘들 산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고 살겠다,"
"규칙적인 생활 하겠다,
늘 산길을 오르내리겠다,"
"무엇보다 여색을 멀리하니
다리가 후들거릴 일도 없겠다."
"이만한 일꾼들도 없지."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나자
승려들은 대거 승군이라는 상비군에 소속되게 된다.
"앞으로 여기서
너희들이 산성을 지키는거야."
"산성이 안보이는데요?"
"없으면 만들어야지."
그리하여 승려들은 전국적으로 차출되어
성 쌓기에 동원되었다.
"저기, 그래도 나름 직업군인이 되었는데
봉급은 어떻게 되나요?"
"중대가리 주제에 뭔 봉급.
대신 산성 근처에 절간 만들어서 살어."
"너희들 시주 하나는 잘 하잖아."
그리하여 서울의 외곽방어선인
북한산성, 남한산성 근처에
수많은 절들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지금도 북한산성에 13개,
남한산성에 7개의 절들이 있는데
모두 이런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 남한산성 주위의 절
그후로 전국에서
'의승'이라는 이름으로
징발된 승군들은 이곳에서
교대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굳이 멀리서 올라올 필요 없이
돈을 내라고 했는데, 연간 1인당 20냥이었다.
일반 양인이
군대 가는 대신에 내는 군역이
5냥 정도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몇 갑절이나 높은 액수였다.
그래서 한 절에
4~5명만 의승으로 배당되어도
절간 살림이
바닥날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나라에서는 승려들이 조용히 불도를 닦도록
내버려두는 일이 없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온갖 잡다한 일들이
중들의 차지가 되었는데,
궁궐을 짓거나,
보수하거나.
왕릉을 조성하거나, 성을 쌓거나, 길을 닦거나
가장 만만한게 승려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 공인 '노가다'였다.
여기에 고을의 잡일도 떠맡아했다.
고을 사또가 관아를 수리하거나
미장일을 하고,
도배를 하려고 하면
그때마다 고을의 중들이 징발되었고
심지어 양반들도 정자를 짓거나
별채를 지을 때도 만만한게 중들이었다.
● 잡다한 사역 : 하루종일 쉴 틈 없던 스님들
그래도 위의 사역들은
매일 있는 일은 아니어서, 그나마 참을만 했다.
그보다 항상 승려들을 괴롭힌 일이 있었으니,
바로 종이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종이 만드는 관청(조지서)가 황폐해져서
종이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절간에 위탁한다.
"종이 만들려면
닥나무가 있어야 하잖아."
"근데 닥나무가 산속에 많아.
그리고 너희는 산속에 살지."
"그러니 너희가 종이를 만드는 거야."
묘한 논리였다.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종이 생산은
대부분 절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종이 만드는 일은
여간 힘든 과정이 아니었다.
닥나무를 베고,
껍질을 벗겨내고,
물로 씻고, 잿물에 넣어 삶고,
으깨어 펄프로 만들고,
한지를 발로 떠내어 말리고,
마지막으로 잡티를 제거하고
다듬이질하고..
이 힘든 일들이 절에 떠넘겨졌으니
중들은 견디다 못해
하나 둘 씩 도망을 갔고
급기야 절이 텅텅 비어버리는 일까지 생겨나게 된다.
게다가 관아의 횡포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이번 종이는 왜 이렇게
품질이 엉망인 것이냐?"
그러면서 종이에 먹물을 뿌려
퇴짜를 놓는 고을 수령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조선조의 문예부흥기라 할 만큼
출판사업이 활발해져서
종이가 특히 많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정조는
조그만 책을 매우 싫어했다는 것이다.
정조
"책을 조그맣게 만들면
게으른 선비들은 필시 누워서 책을 보려고 할게야."
이렇게 책망했기 때문에
당시 만들어진 책들은
모두 크게 만들어야 했고,
그러므로 종이는 더더욱 모자랐다.
그래서 종이를 만드느라
하도 부산을 떤다해서
당시 만들어진 종이를
'헐레벌떡 종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관아에 종이 바치는 일도 벅찬데
고을의 서원, 향교의 양반들까지도 합세하면서
여기저기서 스님들에게
종이를 만들어달라고 협박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종이 다음으로 절에서
많이 만들었던 것은 짚신과 미투리였다.
▲ 짚신과 미투리
이들 물건은 생계를 위해
내다팔기도 했고
절에 온 양반의 노비들에게
뇌물로 갖다 바치기도 했다.
이때 노비들은
마치 자기 물건을 내놓으라는 식으로
승려들을 강압적으로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조선시대 승려는
노비보다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
노비
"니들이 짚신 팔아서 먹고사는 거
다 아니깐 몇개 내놔."
그런가하면 조선시대 절은
두부공장도 역임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두부는 서민들의 요긴한 찬거리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두부는 흔치 않은 별미였다.
그런데 이걸
주로 만들던 곳이 절간이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두부를 먹기 위해
'포회'라는 연회를 절에서 가졌는데..
이때 제대로 두부를 만들어오지 못하면
불손하다고 해서,
인근 사또에게 일러바쳐
중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내린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사대부들이 절간에
조용히 두부만 먹고 가면 좋았다.
사대부
"술에 두부 안주만 먹다보니
뭔가 입이 심심해."
사대부
"어이, 중대가리.
사대부
"저기 냇가에 가서 은어 몇마리 잡아서
매운탕 좀 끓여보고.."
사대부
"닭 몇마리 잡아서
두부탕 좀 만들어봐."
이렇게 스님들에게 살생을 강요하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 양반들의 수탈
나라에서 못살게 구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양반들의 수탈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못된 양반들은 떼로 몰려와
승려들을 구타하고 기물을 부수는가 하면
불경과 탱화를
제멋대로 빼앗아 가기도 했다.
▲ 탱화
심지어 성종 때는 인수대비가
친히 만들어서 보낸 불상을
유생들이 멋대로
불태워 버린 일도 있었고
중종 때는 양반들이 제멋대로
왕실의 보호를 받던 절로 들어가서 (흥천사)
절간의 불상과 불경 등을 도둑질해가다
급기야 절간을 모두 태워먹은 사건도 있었다.
왕실과 비호를 받고 있던 절들도 이러했으니
지방의 사철들의 사정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양반들은
절간이 조용하다고 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절간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절간도 양반들 덕에
어느 정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꼬투리를 삼으려면
허물이 되었다.
율곡 이이는
과거 준비를 위해
1년 간 금강산에 들어간 뒤
불교에 입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의 일이 다른 사대부들에게는
평생의 놀림감이 되었던 것이다.
사대부1
"그때 율곡이도
중들처럼 머리를 잘랐을까?"
사대부2
"불씨에 심취했을 때니, 아마도 상투를 자르고
중대가리를 만들었겠지. 하하하"
한편 절은 양반들에게는
만만한 유흥장이기도 했다.
사대부
"경치도 좋겠다.
즐기면서 놀다 가는거지."
그러면서 양반들은 절간에 기생들을 불러
술 파티를 열고 풍악을 울렸던 것이다.
그야말로 불도를 닦고
참선을 쌓기 위해 고요해야할 절이
시끌벅적한 연회장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흥을 위해
고을 사또가 한번 행차라도 하면
절간의 스님들은
등골이 휘었다.
사또가 한번 절에 놀러오면
항상 많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왔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차리는 잔치상은
항상 어마어마 할 수 밖에 없었고
절간 살림은
당연히 크게 축났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고을 사또의 절간 행차 한번이면
절간의 반년치 경비가
들어간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이때 수령이
값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중간에 아전들이 떼어먹는터라
절간은 하소연할 길도 막막했다.
오죽했으면 호화잔치로
절간 양식이 바닥난 상황에서
스님들 자신들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아랫마을로 내려가
동냥 구걸을 하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깊은 산속이라고
나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명산으로 알려진 곳은
양반들이 주로 찾는 관광터가 되는 바람에
이곳에 위치한 절들 역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참고로 조선시대 3대 명산은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이다.
이곳 절들의 승려들은 양반들의 산행 길을 위해
'남여승'이라는 가마꾼이 되어야만 했다.
▲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 금강산 유람온 사대부들, 왼쪽 한켠에 남여를 메던 중들이 쉬고 있다
사대부
"이넘들이 힘이 좋아서
남여(가마)를 끌면서도 지치지도 않는다니깐."
그런데 이럴 때면
꼭 함께 따라온 노비들도 같이 못살게 굴었다.
남여를 메던 중들이 지나가면
노비들은 머리를 매만지며
노비
"그것 참 맨들맨들하게 잘도 밀었네.
파리가 앉다 미끌어지겠어."
이랬던 것이다.
● 동냥하는 거지 신세
먹고 살기 힘들어진 중들은
종이를 만들어 팔기도 하고, 장사를 하기도 했다.
비구니들은 민가를 돌며
잡패와 화장품 등의 방물을 팔기도 했다.
▲ 방갓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는 비구니 : 신윤복 혜원진신첩 中
여기에 화주승은 걸낭을 메고
집집마다 돌며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이를 흔히 '동냥'이라고 하는데
원래 동냥은 고려시대 스님들이
나귀를 타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하라고, 종을 흔든 것을 뜻했다.
이때 시주는 '헌금'의 의미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그딴거 없다.
조선시대 동냥은 그저 '한푼 줍쇼'와 같은
'구걸'의 의미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불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대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승려가 되곤 했다.
이들 중에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절에 들어온 이,
죄 지어 숨어들어온 이,
세금에 짓눌려 도망쳐온 이,
빚지고 몰래 숨어들어 온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진심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승려가 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스님들은 글도 꽤 읽고
시도 지을 줄 아는 지식층이었으니
주위사람들로부터 받는 수모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모두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시주를 하면, 집안의 어린아이에게
재앙이 끓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서,
기꺼이 양식을
퍼주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가하면 불심이 깊은
부자를 신도로 두게되면,
커다란 재물을 시주받고
나름 호의호식하는 승려들도 없지않아 있었다.
혹은 문예에
조예가 깊은 승려들은
양반들과 어울려 문학과 철학을 논하며
'고승대덕'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려들은
매우 고달픈 삶을 살아야만 했다.
여기서 아이러니컬한게 있다.
원래 고려시대 스님들은
국가생산에 전혀 기여를 않는 '밥버러지'라고 해서
사대부들의 탄압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오면
스님들은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저렴한 임금으로
국방을 담당하고, 건설을 담당하고,
재화 생산을 담당하는
그 어떤 계층보다 생산에 기여하는
'산업역군'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고려말 '잉여인간'을 비판하던
사대부들 스스로는
사회를 좀먹는
거대한 밥버러지 계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 18세기 이후의 불교
참고문헌 : 상상밖의 한국사(김정현),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정연식), 엽기조선왕조실록(이성주), 말타고 종부리고(송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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